한국미술평론가협회장 서성록님
한나영의 작품을 보면서 필자는 ‘진정한 만남’을 생각했다.
사람 사이의 접촉이 부족한 세상도 아닌데 새삼스럽게 만남을 언급하는 이유는
그 만남의 속성이 쉽게 만나고 헤어지는 만남이 아니라 친밀하고 진솔하다는 데에 있다.
한나영의 작품은 정(情)과 애(愛)를 읊조리는 조형시를 방불케 한다. 그의 작품이 보면
볼수록 따스하고 정겨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엄마와 아이 사이에 오가는 사랑,
연인의 관계, 친구끼리의 우정, 부부의 도타운 사랑이 투영되어 있는 것같다. 사랑의
테마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이자 그칠 줄 모르는 예술의 레퍼토리나 다름없다.
그런 테마 자체가 작품의 비옥한 밑거름이 되어주고 있다.
그의 대리석 작품에는 대체로 두 매스가 좌우편을 차지한다. 그리고 각각의 매스는
다시 하단과 상단으로 이등분되어 있다. 손바닥위에 둥그런 달덩이를 얹혀놓은 것
같기도 하고 꽃받침위에 꽃이 활짝 핀 것같은 모양을 하기도 한다. 유기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뭔가를 상기시키도록 연실 펌프질을 하고 있다. 몇 개의 시적 어휘가
우리의 머리속에 들어와 번져나가듯이 간결한 조형어휘가 풍부한 상상을 유발시킨다.
그의 작품은 단일한 구조물이 따로 등장하는 법이 없다. 적어도 두 개 이상의 구조물이
잘 짜여진 피륙처럼 얽혀 등장한다. 흥미롭게도 좌우편의 매스는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띠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의 매스는 상대 쪽에 고개를 기울인 포즈를 취하는데
마치 다정한 연인의 관계 같기도 하고 상대 품에 안긴 움직임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결합’과 ‘호응’이 그의 작품에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 결합이 서로의
약함을 보완해주고 서로를 끌어주고 당겨준다. 입을 맞추고 품어주고 껴안고 기대는 등
둘의 관계는 사뭇 따듯하고 훈훈하다. 이런 정황으로 볼때 이 둘은 외적으로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단단히 결속되어 있음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현악기의 줄이
따로 떨어져 있으나 멋진 화음을 내듯이 두 매스는 서로를 품으며 사랑을 연주한다.
작가는 전체적으로 유기적인 형태를 선호한다. 각진 형태를 피하고 대체로
부드러운 곡선과 구체, 볼륨을 중시한다. 특히 자연을 닮은 미려한 선이 감상자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그 선이 딱히 어디서 출발했는지 알 수 없지만 전체를 부드럽게
감싸고 돌면서 한층 여유롭고 평화롭게 만든다.
구성에 있어서도 좌우의 비대칭이 더없이 자연스럽다. 보다시피 좌우의 구조물은
높이도 다르고 크기도 다르다. 닮은 부분보다는 다른 부분이 더 많다. 상호의존적인
패턴을 곁들이지 않았더라면 상당히 머쓱하게 보였을 것이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없이 서로를 향해 다가감으로써 이 구조물들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임을
확인시켜준다. 상이한 것끼리의 만남이 갈등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상승작용을
하여 <연(緣)>과 <정>을 낳고 <노래>를 탄생시키며 <꿈>을 꾸게 만드는 창조적인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이미 국제무대에서도 호평을 받은 적이 있다. 2400점이나 응모한
북경올림픽 개최기념 환경조각 국제대회에서 최종적으로 290점의 수상작중에서
당당히 우수상을 받았다. 그는 아직도 이런 수상의 주인공이 된 것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 지구촌의 내노라할만한 조각가들이 경연을 벌여 최종 엔트리에
오른 것도 큰 영광이지만 그가 평소 존경하는 키네틱 조각가 알폰소(Alfonso)와
함께 역대올림픽 개최도시인 16개국의 35개 도시를 순회하며 작품전시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미학자 죠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세계는 잘 단합되어 있어
아름답고 조화롭게 상응하는 모습으로 창조되었다”고 언급한다. 그에 의하면
그 자신과의 관계에서는 아름다우나 전체, 즉 우주의 일부로서는 아름답지
않은 것은 거짓의 미 혹은 국한된 미이지만 사물들의 전체와의 관계에서
아름다운 것은 넓게 확장된 탁월성, 즉 진정한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은
사람들과의 관계, 사물들과의 관계, 전체와의 관계속에서 태어난다. 그가
아름다움의 기준을 이처럼 ‘관계’로 파악한 것이 흥미롭다. 관계의 탁월성이
그의 미학에선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데 그의 저술에선 자아를
얼마나 돋보이게 하는가(being beautiful)가 관건이 아니라 타인을 이해하고
마음을 내어주는가(bestowing beauty)가 관건이 된다.
그러면 우리는 얼마나 서로를 향해 다가갈까. 말은 풍성하지만 정작
우리 주변에는 공허한 잡담과 속이 빈 대화, 따분한 비밀 이야기 투성이다.
사람들을 자신의 부가물이나 부속물로서 사랑하지만 안타깝게도 관계의
전적인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만다.
예술은 우리 삶의 결여된 부분을 환기시키고 보충해준다. 만일 그의 작품을
보면서 마음의 경계를 풀게 되었다면 그것은 사랑과 친밀함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실례라 하겠다. 존재끼리의 사랑은 탈취나 종속이 아니라
자유로운 행동의 흔들리지 않는 기초가 된다. 정원사가 자상한 손길로 꽃을
자라게 돕는 것처럼 따듯한 온기로 상대의 몸을 덮어주는 온전한 자기표현을
가능케 한다. 예술이 ‘열린’ 자아와 접목될 때 더 큰 메아리로 다가온다는 것을
한나영의 작품에서 발견하게 된다.